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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사

수학의 3대천재 아르키메데스2(Archimedes, BC 287?-BC 212)

by 팥맛콩 2022.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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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키메데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수학자 코논(Konon)의 문하에 속해 있었다. 그는생애의 대부분을 보내게 된 그의 고향인 시라쿠사에 돌아온 후에도 자기의 저작을 코논에게 보내서 교열을 받았다고 하며, 또한 규칙적인 서신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전한다.시라쿠사의 주권자에 대한 연고 때문에, 그의 역학 방면의 뛰어난 역량을 투석기와 같은병기의 완성에 응용하였다. 고대인의 많은 기계의 발명을 아르키메데스에게 돌리고 있다. 그 가운데는 겹도르래, 나선 양수기를 들 수 있다. 후자는 오늘날 이집트에서 나일 강 유역의 관개에 사용하고 있다.

 

아르키메데스에 관한 많은 기사 중에서도, 특히 그가 그의 조국 시라쿠사를 방어하기위하여 행한 사적에 관한 기사에 있어서는 진실과 오류를 선별하기 어렵다. 예를 들면,햇빛 모으기 오목거울에 대해서도, 실제로 "그가 포위군의 선박을 오목거울로 불타게 했다"는 있을 법하지 않은 말을 한 후세의 저술가들보다는 그가 그 작용을더 잘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이론이 그에게 작은 힘으로 무거운 화물을 움직이는 방법을 구했다. 그래서 그는 도르래를 발명하여 왕의 면전에서 무거운 짐을 실은 삼단 요선을 쉽게 육지로 끌어왔다."라는 말이 있다. 아마도 그는 무한 나사와 톱니바퀴를 조합한 장치를 같은 목적에 사용하였을 것이다. 아르키메데스가 조립한 일종의 유성의도 큰 경탄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은 중심에 지구가 있고, , , 그리고 유성들이 그 주위를 회전하고 있게 한 기계적 장치 (아마도 수력에 의한)이다. 이 제작품에 대해서는 키케로(Cicero)가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또 중세에 만들어진 유성의, 예컨대 스트라스부르(Strassburg) 대사원의 시계의 본보기가 되었다.

 

아르키메데스의 만연은 시라쿠사 포위 공격과 때를 같이하므로 보고도 좀 더 상세하다. 사가들에 의하면, 이때 아르키메데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나 끝에는 슬픈 최후를 맞이했다. 이때의 일도 우리에게 전해진 것은 진실과 작위를 혼합하고 있다. 시칠리아의 운명을 결정할 제2 포에니전쟁은 기원전 218년에 알렉산더 이래로 볼 수 없었던 한니발(Hannibal, BC 247~183) 장군의 연속적 승리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전세는 다시 역전됐다.

 

그래서 한니발이 이탈리아반도를 교묘히 전전()하고 있는 동안 로마인은 시칠리아의 도시들을 차례로 함락시켜 섬 전체를 수중에 넣었다. 로마의 장군 마르셀루스(MarcusClaudius Marcellus, BC 270~208)에 대하여 가장 무서운 저항을 한 도시가 아르키메데스의 고향인 시라쿠사였다. 이 도시가 몇 달간 공격에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아르키메데스의 방어 시설 덕택이었다. 효과와 명중률이 탁월한 투석기는 공격군을 위축시켰다. 그리고 해군의 공격에 대해서는 횃불을 날려 받아쳤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을 후대의 사가들이 아르키메데스는 오목거울로 적함을 불살랐다고 말하였을 것이다.

 

최후로 로마 군대가 시라쿠사를 점령하였을 때, 로마 병사들은 노고와 사상에 극도로 분노하여 무서운 학살을 자행했으며, 아르키메데스도 그때 희생되었다. 마르셀루스가 그의 죽음을 몹시 애석해했다고 한 것은 사실인 듯하나, 그의 최후에 대한 여러 보고는 각각 다르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아르키메데스가 수학 문제에 몰두해 있을 때 로마 병사 한 사람이 들어가 찔러 죽였다는 일화인데, 그가 최후의 순간에 남긴 말은 "Noliturbare circulos meos. (내 원을 흩트리지 말라.) 한다. 이 학자의 묘비에는 원기둥에 내접한 구가 조각되어 있다. 이것은 아르키메데스 자신이 희망한 것으로, 그가 "구의 부피는 외접한 원기둥의 부피의 2/3와 같다."라고 한 자신의 발견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가를 말해주고 있다. 그를 공격한 로마의 장군 마르셀루스가 건립한 이 묘비는 그 후 황폐해져 있다가 키케로가 발견하여 이것을 망각에서 구해냈다. 키케로는 이 묘비 발견의 경위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칠리아의 재무 장관을 하고 있을 때, 나는 시라쿠사 사람들도 모르고 있었던 아르키메데스의 묘를 발견했다. 그 경위는 다음과 같다. 나는 묘비에 새겨진 두세 가지의 작은 시구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시구는 묘비 상부에 원주에 내접한 구가 새겨져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아그리겐툼(Agrigentum)으로 가는 길 문 앞에 있는 많은 묘 가운데에 관목의 덤불 위에 머리를 조금 내민 작은 석주에 원주로 쌓인 구의 그림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나는 따라온 시라쿠사 사람들에게, 이것은 아르키메데스의 묘비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그곳을 청소시켰다. 그랬더니 각부 정면에 새긴 글이 나타나서 아르키메데스의 묘인 것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한 이국인이 그 시민들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이 마구나 구라이키아에서 가장 뛰어났고, 한때는 그렇게도 학문이 높았던 이 도시 사람들은 자기들의 최대 학자의 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키케로는 또한 이 고대 최대의 수학자에 대한 찬탄의 정을 아르키메데스는 인간의 이성에 허락된 이상의 천재성을 지니고 있었다!"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유명한 과학 사가인 딜스(Hermman Diels, 1848~1922)다면성과 천재성에 있어서 그에 필적할 만한 사람을 근대에서 찾는다면, 아마도 가우스(Gauss) 외에는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 과학의 기초를 세우고 나서 약 100년 후에 아르키메데스를 사로잡은 문제는, 특히 정역학(力學) 분야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이 문제를 진정한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즉 실험과 수학적 유도에 기초하여 다루었고, 그래서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따라서 그의 업적은 정밀과학에서의 그리스 정신의 가장 탁월한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근대 과학 정신의 시효로 볼 수가 있다. 이 위대한 업적이 주로 예술과 철학에 치중해 있던 그리스 본토가 아니고, 상업 무역이 번영하고 과학의 연구에 적합하게 오성에 어느 정도 냉정성이 나타나 있던 마구나 구라이키아에서 나타난 것은 우연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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