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누이 일가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집안이다. 이 가계에서 무려 여섯 명의 수학자와 한 명의 천문학자가 나왔다. 때문에 '베르누이의 수 '베르누이의 정리', '베르누이의 방정식 말을 들으면 도대체 어떤 베르누이인지 사전이라도 찾아보지 않는 이상 명확히 알 수가 없다.
그 밖에 이러한 사례는 영국의 생물학자 찰스 다윈 Charles Robert Darwin(1809~1882) 일가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자코브 베르누이 Jakob Bernoulli(1654~1705)와 그의 동생인 요한 베르누이 Johann Bernoulli(1667~1748), 요한의 아들인 다니엘 베르누이 Daniel Bernoulli (1700~1782)가 유명하다.
베르누이 가문은 원래 플랑드르 출신이었는데, "알바 공의 탄압을 피해 스위스의 바젤로 이주했다. 자코브 형제의 아버지는 바젤의 시의원이었다.
자코브는 본래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신학을 공부했으나 어느 사이엔가 수학자가 되고 말았다. 그는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등을 널리 여행하고 바젤로 돌아와 수학 교수가 되었다.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사람 중에는 동생인 요한과 사촌 니콜라스Nicolaus Bernoulli, 그리고 파울 오일러 Paul Euler 등이 있는데, 파울 오일러는 이후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의 아버지가 되는 사람으로 오일러 가문과 베르누이 가문의 친교는 아버지 대부터 계속되었다.
자코브와 요한 형제는 라이프니츠의 미적분법이 공표되자 즉시 공부를 시작해 그것을 발전시켜 나갔다. 형인 자코브는 라이프니츠가 증명 없이 발표한 급수,
를 증명하며 급수의 이론에 빠져들었다.
베르누이 형제는 등주문제와 최단강하 곡선 등에 대해 연구했다.
등주문제에 관해서는 로마의 적수였던 카르타고를 세운 여왕 디도 Dido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 Publius Vergilius Maro에따르면, 디도는 지중해에 접한 시리아의 항구 도시에서 생명의 위협을 피해 가신들과 함께 배를 타고 도망쳐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자 서쪽으로 서쪽으로 항해를 했다. 그리하여 장래의 주거지로 선택한 땅에 도착한 디도는 그곳의 원주민들에게 단지 소가죽 한 장으로 둘러쌀 수 있을 만큼의 토지를 얻고 싶다며 요청했다. 사실 여기에는 깊은 계책이 숨어 있었지만, 원주민들은 이를 승낙했다. 그러자 디도는 소가죽을 아주 가늘고 길게 잘라서 매우 기다랗게 연결한 다음, 그 끈으로 원주민들이 미처 생각지도 못한 넓은 언덕을 둘러싸 그곳을 차지해 버렸다. 그 언덕은 지금도 비르사(Byrsa, 소가죽이라는 뜻)라고 불린다. 디도는 그곳에 성을 쌓았고, 그것이 시실리 섬 반대편 해안에 있던 도시 카타르고의 기원이었다고 한다.
그때 디도가 소가죽 끈을 어떤 형태로 만들어 언덕을 둘러쌌는지는 베르길리우스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그녀가 수학자였다면, 어떤 형태로 끈을 만들어야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할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그 정답을 알았다 해도 실제로는 여러 가지 요소에 따라 그대로 실천할 수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많은 사람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요소 때문에 그와 같이 별 의미가 없어 보이는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넘어간다. 그러나 수학자는 그러한 문제를 받아들여 연구함으로써 미래를 위해 대비한다.
베르누이 형제가 연구했던 주문제가 바로 이 디도의 소가죽 끈 이야기와 같은 문제였다. 즉, 길이가 제시된 곡선으로 최대한 많은 면적을 둘러싸려면 곡선의 모양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느냐는 이야기다. 훗날 변분법이라고 불리는 이 문제는 오일러에게 계승되었고, 나아가 라그랑주가 바통을 이어받아 아름다운 형태를 띠게 된다.
플라톤은 한 나라의 지배자가 철학자이기도 한 국가를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이상이 실현된 적은 거의 없다. 플라톤은 스스로 그런 나라를 세우고자 시칠리섬의 시라쿠사까지 갔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우리는 한 나라의 지배자가 철학자와는 반대로 권력이나 영화, 명성에 일생을 낭비하는 모습을 수없이 보아 왔다. 따라서 국가의 지배자가 수학을 공부하거나 수학의 발전을 장려하고 수학자를 지원하는 경우를 보면, 그것은 정말로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집트의 왕 프톨레마이오스는 기하학 공부가 너무 어려워 애를 먹자 유클리드에게 좀 더 쉬운 학습법은 없냐고 물었다가 “기하학에 왕도는 없습니다.”라는 핀잔을 들었다. 반면 중국 청나라의 강희제 帝(1654~1722)는 스스로 유클리드를 공부해 왕자들에게도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나 청나라에서 기하학이 번영하지는 못했다.
근세에 들어와서 수학을 좋아하고 수학자를 중요하게 여긴 지배자로는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이 있다. 또한 수학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지만 수학자를 후원했던 지배자는 독일의 프리드리히 2세 ,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1세, 예카테리나 2세, 안나 여제가 있다.
프리드리히 2세는 1740년부터 1786년까지 독일(로이센)을 지배한 왕으로, 프리드리히(평화)라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게 전쟁의 달인이었다. 또 피리를 불고 시를 짓는 것을 사랑하는 문화인이면서도 외국에 대해서는 어떠한 비겁한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Versailles 궁전을 지은 것을 따라 해 베를린 교외의 포츠담 Potsdam에 상수시궁전 Schloss Sanssouci을 지었으며, 1700년에 라이프니츠가 세웠던 베를린 아카데미를 재건해 전 세계의 학자들을 초빙했다. 그곳에 온 적이 있는 사람으로는 프랑스의 볼테르와 스위스의 오일러, 이탈리아의 라그랑주 등이 있으며, 달랑베르는 베를린에는 가지 않았지만 프리드리히 2세와 자주 편지를 주고받았다.
예카테리나 1세는 남편인 표트르 대제가 죽은 뒤, 1724년에 남편이 생전에 라이프니츠의 권유로 뜻을 세웠던 아카데미를 상트페테르부르크 Saint Peterburg에 설립하고 스위스에서 다니엘 베르누이와 오일러를 초빙했다. 이 두 나라는 모두 외국에서 수학자를 데리고 왔다. 사실 독일에는 독일에서 태어난 수학자도 1명 정도는 있었지만………….
하지만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만은 외국에서 수학자를 불러올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미 프랑스의 아카데미에는 라그랑주와 몽주, 라플라스와 르장드르, 카르노, 푸리에, 푸아송 등 유명한 수학자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또 사관을 양성하는 학교인 에콜 폴리테크니크(École polytechnique)와 교사를 양성하는 학교인 에콜 노르말(École Normale Superieure)에는 다음 세대를 이끌어나갈 천재들이 자라고 있었다.
특히 제일 처음에 열거한 라그랑주와 몽주, 라플라스는 나폴레옹의 총애를 받아 백작 작위를 하사받았는데, 이는 전에 없던 파격적인 대우였다. 뉴턴조차 기사 작위를 받아 말단 귀족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몽주는 직공의 아들이었고, 라플라스는 농민의 자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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