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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사

무한대를 본 남자 스리니바사 라마누잔1 (Srinivasa Ramanujan, 1887-1920)

by 팥맛콩 2022.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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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학자라면 어떻게든 결국 스리니바사 라마누잔의 생각이 점차 이해되기 시작한다.

 

라마누잔이 인도 남부의 작은 도시 쿰바코남에서 태어난 지 100년이 넘게 흘렀다. 서른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아주 이상하고 낯선 4,000여 개의 공식이 적혀 있는 3권의 노트와 몇 장의 쪽지를 남겼다.

 

수학계에서 라마누잔의 영향력과 독창성은 그가 숨을 거두기 불과 몇 년 전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그의 이론에서, 라마누잔이 숫자라는 황무지를 지배하는 숨은 법칙과 관계를 계산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라마누잔은 정규 수학교육을 받은 적이 없으며 왕성하게 연구하던 시절 대부분을 지리적으로 격리된 곳에서 보냈다. 그의 공식은 얼핏 보기에 우아한 것만큼이나 이해하기 어렵다. 그리고 자기 자리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연구하면서, 당시 수학의 선구자들과는 전혀 다른 정신세계로 방정식과 정리를 생각해냈다.

 

오늘날 그의 업적은 100년 전에 상상했던 것보다 더 깊숙하게 수학과 과학 분야로 흘러들고 있다. 지금은 평범한 수학자들도 대수적 수량을 다루는 특별한 프로그램이 설치된 컴퓨터를 사용하여 라마누잔의 생각을 되짚어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현대 물리학이 우주론의 초끈 이론부터 복잡한 분자계를 설명하는 통계 역학에 이르기까지, '정수론과 복소해석학의 이론적 발견'이라고 할 수 있는 라마누잔의 사상에 더 많이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법의학적 수학 또는 수학의 고고학 과정에 집중하면서, 개략적으로 쓰인 라마누잔의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고 공식을 이해하고 증명하려 노력하고 있다. 라마누잔이 왜 자신만의 특별한 방향을 선택했는지 더 많이 알게 되면서, 연구자들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근거가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다.

 

캐나다 노바스코샤주 핼리팩스에 있는 하우지 대학의 조너선 M. 보와인Jonathan M.Borwein 교수는 "라마누잔이 뜬금없이 유도해낸 특이한 증명을 보면, 신기할 뿐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참이었다"고 말했다. 보와인 교수는 자신의 연구가 라마누잔의 공식에 의존하고 있음을 최근 들어 깨달은 수많은 수학자 가운데 한 명이다. “그걸 보면 라마누잔이 명확하게 밝히지 않아서 어딘가 숨겨져 있는 정리가 있을 것 같다. 물론 찾기는 어렵겠지만 말이다.”

 

그게 어디 있는지 추적하기는 어렵다. 일부러 그랬는지 아니면 습관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라마누잔의 독특한 연구 방식은 현대 수학자들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한편 좌절감을 주기도 한다. 석판에 공식을 휘갈겨 쓰다가 팔꿈치로 지우고 조금 더 쓰다가 최종 결과가 나왔을 때만 애지중지하는 노트에 옮겨 적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결고리인 중간 결과는 남아 있지 않다. 라마누잔은 주류 수학자들과는 달리 결과가 참이라는 것을 증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의 유산은 한무더기의 '발견'뿐이었다.

 

사물에 대한 느낌

 

보와인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라마누잔이 생각하는 방식은 우리가 아는 그 어떤 사람과도 달랐다. 머릿속에 어떤 것에 대한 감 이 있어서 밖으로 그냥 술술 흘러나오는 것이다. 아마도 어떤 것을 본 다음에 해석하는 방식은 아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축제에 가지 않고도 축제에 참여한 사람을 보고 있는 것 같다고 할까."

 

그래서 수학자들은 라마누잔이 참이라고 생각했던 정리를 증명하느라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다(대부분 가치 있는 시간이었고 성과도 있었다.) 공식 자체보다 공식을 유도하면서 더 많은 것이 밝혀질 때가 많았다. 특이하고 황량한 고립 상태에서 라마누잔이 제안했던 아이디어 주변에서 그렇게 완전히 새로운 수학 분야가 활짝 꽃을 피웠다.

 

그의 탄생 100주년이라는 특별한 이유로, 수학자들이 미국과 인도에서 회의를 열고 라마누잔의 연구가 끼친 영향에 관해 함께 모여 토론하고 있다. 회의에는 연구 대상인 라마누잔이 남긴 원본 자료가 그 어느 때보다 많이 모였다. 라마누잔이 남긴 기록을 찾고 정리하기 위해 지난 10여년간 애쓴 결과였다.

 

일리노이대학의 수학자 브루스 번트 Bruce Bernolt 교수는 오랫동안 라마누잔이 남긴 노트를 편집하고 출처와 관계를 추적했으며, 무엇보다도 아직 증명되지 않은 정리를 최대한 많이 증명했다.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의 수학자 조지 앤드루스 George Andrews 교수는 라마누잔의 인생 후반기에 작성된 130쪽 분량의 메모인 이른바 '잃어버린 노트'로 번트 교수와 같은 작업을 했다.

 

앤드루스 박사와 함께 라마누잔의 업적을 연구한 위스콘신대학의 리처드 애스키Richard Askey 교수는 "생명이 꺼져가던 마지막 한 해 동안 라마누잔이 했던 연구는 아주 위대한 수학자가 평생에 걸쳐 연구했던 양과 맞먹었다"고 말했다.

 

라마누잔의 연구 성과는 정말 믿을 수 없을 지경이다. 소설 속 이야기라고 해도 믿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라마누잔이 1912~1913년에 걸쳐 영국 수학자에게 간절하고도 대담한 편지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도 철저하게 알려지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편지를 쓸 당시 라마누잔은 25세였고 몇 년간 일자리를 찾다가 석판과 공식을 손에서 놓은 채 연봉 30달러짜리 점원으로 일하는 중이었다.

 

라마누잔의 가족은 힌두교 신자였고 상류 계급이었지만 가난했다. 라마누잔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포목점 직원이었다. 라마누잔은 운 좋게 쿰바코남에서 아주 좋은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학교 도서관에서 낡은 참고서 몇 권을 발견한 뒤로 수학에서 창의적인 탐구 활동을 시작했다. 무명의 힌두교도 직원

 

라마누잔은 분명 지능이 뛰어났지만, 고향에서 북쪽으로 240여 킬로미터 떨어진 마드라스에 가서 응시한 대학 입학시험에서는 다른 과목 때문에 거듭 고배를 마셨다. 수학도 선생님 없이 혼자 공부했다. 영국 수학자 고드프리 해럴드 하디 Godfrey Harold Hardy 교수는 훗날 "사실상 라마누잔은 현대 유럽 수학을 전혀 모른 채 연구했다"고 말했다.

 

하디 교수는 자신이 "무명의 힌두교도 직원, 기껏해야 제대로 교육받지도 못한 인도인"이라고 생각했던 라마누잔의 편지를 처음 받은 사람은 아니었다. 편지에 담긴 내용을 첫 번째로 이해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라마누잔의 편지에는 "저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압니다. 그리고 이런 것도 알고요. 게다가 이런 것도 발견했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라마누잔은 신중하게 선택한 정리를 편지에 써서 보냈다. 대부분은 항등식(변수를 포함한 등식으로 변수에 임의의 값을 대입해도 항상 성립하는 등식 옮긴이) 형태로, 원주율()처럼 친숙한 기호와 어떤 낯선 기호가 같다거나 아니면 두 개의 낯선 기호가 서로 같다거나 하는 설명이었다.

 

그 편지를 자세히 살펴보면서 하디 교수는 당혹스러웠다. 훗날 하디 교수는 눈에 띄는 몇 줄이 있어서 봤더니 예전에 자신이 증명했던 문제와 비슷한 것 같았다고 말했다. 개중에는 마음만 먹으면 증명할 수 있겠다 싶은 것도 있었다. 그런데 증명하긴 했지만, 그 과정이 너무 어려워서 깜짝 놀랐다.

 

그 외에 다른 정리들은 이미 알려진 것이었다. 하지만 몇 년 후에 하디 교수는 에세이에서, 나머지 정리들도 "저를 완전히 좌절하게 했습니다"라고 썼다.

 

케임브리지로의 여정

 

하디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그 정리는 당시만 해도 전혀 듣도 보도 못한 것들이었다. 최고의 수학자가 썼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틀림없이 참이었을 것이다. 참이 아닐 수 없다. 그걸 거짓으로 지어낼 만큼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하디 교수는 라마누잔에게 무엇인가 좀 더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틀림없이 좀 더 일반적인 형태의 정리도 있고 구체적인 예시도 있을 것으로 짐작한 것이다. 하디 교수는 라마누잔을 케임브리지로 초대했고, 라마누잔은 아내를 고향에 남겨두고 1913년에 케임브리지로 왔다. 그리고 케임브리지에서 거의 6년간 머물렀다.

 

두 사람은 공동 연구를 자주 했다. 하디 교수의 기억에 라마누잔은 작고 여위었으며 중간 정도 키에 눈에서는 광채가 나오는 듯했다고 한다. 라마누잔은 철저하게 채식주의를 지키면서 방에서 직접 음식을 요리해 먹었다. 1917년 라마누잔이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에 걸렸을 때 하디 교수는 채식 때문에 건강을 잃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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