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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사

무한대를 본 남자 스리니바사 라마누잔2 (Srinivasa Ramanujan, 1887-1920)

by 팥맛콩 2022.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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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 매력을 함께 나누다

 

몇 년 후 하디 교수는 라마누잔이 그저 신기한 아시아인일 뿐이며 '영감을 받은 멍청이' 아니면 '태곳적 동양의 지혜가 불가사의하게 발현된 사람'일 뿐이라는, 영국인들의 미묘한 인종차별주의를 없애느라 고생했다. 하디 교수의 눈에 비친 라마누잔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반대로, 신중한 합리주의자였으며 상황 판단이 빠를 때가 많았다. 그리고 채식주의자라는 것에서 받는 인상과 달리 그다지 종교적이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거의 살아 있는 생물이나 이야기 속 주인공과도 같은 숫자의 매력을 함께 나누었다. 그리고 30022×3×52처럼 작은 인수로표시하는 '어림수'에 관한 생각을 많이 했다. 엄격한 수학 용어로 그렇게 표시할 수 있는 수가 얼마나 흔한지 살펴보았고, 말로 표현하기가 더어려운 많은 문제도 연구했다.

 

아주 흥미로운 수

 

라마누잔이 병에 걸린 다음날, 하디 교수는 택시를 타고 라마누잔을 찾았다. 그리고 오는 길에 탄 택시의 번호가 1729, 그러니까 7×13×19번이라면서 별로 재미없는 수였다는 말을 건넸다. 훗날 하디 교수는 라마누잔이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고 전했다. "아니요, 그건 아주 흥미로운 숫자예요. 두 개의 세제곱수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는 가장 작은 수거든요. 두 가지 경우가 있어요.” (, 1×1×112×12×12의 합으로 나타낼 수도 있고, 9×9×910× 10×10의 합으로 나타낼 수도 있다.) 하디 교수는 동시대 학자들 그 누구보다 라마누잔을 이해하고 진가를 알아보았다. 하지만 그랬던 하디 교수도 당시의 시공간적 한계를 넘지는 못했다. 그에게 라마누잔의 이야기는 결국 제대로 된 교육이나 지도를 받지 못한 천재라는 비극이었다. 그래서 젊은 수학자 라마누잔의 연구와 그 연구가장래에 미칠 영향을 평가할 때는 실망감을 드러냈다.

 

1927년 하디 교수는 '아주 위대한 연구에 응당 있어야 할 단순함과필연성이 없다. 낯선 느낌이 조금만 덜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라고 썼다.

 

오늘날 하디 교수의 평가에 수긍하는 수학자는 거의 없다. 그 낯설음은 빛을 발했고 하디 교수는 라마누잔의 위대한 그림자 속에 묻히고 말았다.

 

애스키 박사는 "하디 교수는 라마누잔이 100년 더 일찍 태어났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하디 교수가 말한 100년 전은 위대한 공식이 나왔던 시대, 오일러나 가우스 같은 수학자들이 수학의 기초를 닦았던 시대였다. 애스키 박사는 "나는 오히려 100년이 지난 요즘 태어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금 변수가 몇 개 있는 문제를 풀려고 애쓰는 중인데, 그런 문제들이 더 어렵다. 누군가 문제 해결에 직관을 보태준다면 정말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라마누잔의 직관이 모두 옳았던 것은 아니다. 몇 가지 오류도 있다. 주어진 수보다 작은 소수의 근사치를 알아내는 공식을 찾았다고 주장한 적이 있지만, 그런 공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라마누잔은 너무 낙관적이기도 했는데, 동시대 사람들과는 다른 점이었다. 19세기 들어 다른 수학자들은 절대 풀 수 없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라마누잔은 지역적으로 격리되어 있던 탓에 유럽 수학자의 연구나 풀 수 없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1919년 병이 악화되자 라마누잔은 요양소 몇 군데를 전전하다가 인도로 돌아갔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의 고통과 맞서 싸우며 열정적으로 연구를 계속했고, 알아낸 모든 것을 종이에 기록했다. 그리고 다음해 4월 서른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76년 라마누잔의 기록을 발견하다

 

수의 매력을 함께 나누다

 

몇 년 후에 하디 교수는 라마누잔이 그저 신기한 아시아인일 뿐이며 '영감을 받은 멍청이' 아니면 '태곳적 동양의 지혜가 불가사의하게 발현된 사람'일 뿐이라는, 영국인들의 미묘한 인종차별주의를 없애느라 고생했다. 하디 교수의 눈에 비친 라마누잔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반대로, 신중한 합리주의자였으며 상황 판단이 빠를 때가 많았다. 그리고 채식주의자라는 것에서 받는 인상과 달리 그다지 종교적이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거의 살아 있는 생물이나 이야기 속 주인공과도 같은 숫자의 매력을 함께 나누었다. 그리고 30022×3×52처럼 작은 인수로 표시하는 '어림수'에 관한 생각을 많이 했다. 엄격한 수학 용어로 그렇게 표시할 수 있는 수가 얼마나 흔한지 살펴보았고, 말로 표현하기가 더 어려운 많은 문제도 연구했다.

 

아주 흥미로운 수

 

라마누잔이 병에 걸린 다음 날, 하디 교수는 택시를 타고 라마누잔을 찾았다. 그리고 오는 길에 탄 택시의 번호가 1729, 그러니까 7×13×19번이라면서 별로 재미없는 수였다는 말을 건넸다. 훗날 하디 교수는 라마누잔이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고 전했다. "아니요, 그건 아주 흥미로운 숫자예요. 두 개의 세제곱수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는 가장 작은 수거든요. 두 가지 경우가 있어요.” (, 1×1×112×12×12의 합으로 나타낼 수도 있고, 9×9×910× 10×10의 합으로 나타낼 수도 있다) 하디 교수는 동시대 학자들 그 누구보다 라마누잔을 이해하고 진가를 알아보았다. 하지만 그랬던 하디 교수도 당시의 시공간적 한계를 넘지는 못했다. 그에게 라마누잔의 이야기는 결국 제대로 된 교육이나 지도받지 못한 천재라는 비극이었다. 그래서 젊은 수학자 라마누잔의 연구와 그 연구가 장래에 미칠 영향을 평가할 때는 실망감을 드러냈다.

 

1927년 하디 교수는 '아주 위대한 연구에 응당 있어야 할 단순함과 필연성이 없다. 낯선 느낌이 조금만 덜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라고 썼다.

 

오늘날 하디 교수의 평가에 수긍하는 수학자는 거의 없다. 그 낯섦은 빛을 발했고 하디 교수는 라마누잔의 위대한 그림자 속에 묻히고 말았다.

 

애스키 박사는 "하디 교수는 라마누잔이 100년 더 일찍 태어났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하디 교수가 말한 100년 전은 위대한 공식이 나왔던 시대, 오일러나 가우스 같은 수학자들이 수학의 기초를 닦았던 시대였다. 애스키 박사는 "나는 오히려 100년이 지난 요즘 태어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금 변수가 몇 개 있는 문제를 풀려고 애쓰는 중인데, 그런 문제들이 더 어렵다. 누군가 문제 해결에 직관을 보태준다면 정말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라마누잔의 직관이 모두 옳았던 것은 아니다. 몇 가지 오류도 있다. 주어진 수보다 작은 소수의 근사치를 알아내는 공식을 찾았다고 주장한 적이 있지만, 그런 공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라마누잔은 너무 낙관적이기도 했는데, 동시대 사람들과는 다른 점이었다. 19세기 들어 다른 수학자들은 절대 풀 수 없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라마누잔은 지역적으로 격리되어 있던 탓에 유럽 수학자의 연구나 풀 수 없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1919년 병이 악화하자 라마누잔은 요양소 몇 군데를 전전하다가 인도로 돌아갔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의 고통과 맞서 싸우며 열정적으로 연구를 계속했고, 알아낸 모든 것을 종이에 기록했다. 그리고 다음 해 4월 서른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76년 라마누잔의 기록을 발견하다

 

1976년에 라마누잔이 눈을 감기 전 1년간의 연구가 담긴 130장의 종이가 케임브리지대학 트리니티 칼리지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의 앤드루스 박사가 갖가지 고지서,편지와 함께 상자에 들어 있는 라마누잔의 기록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잃어버린 노트'.

 

보와인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영국에서도 손꼽히는 대학의 유명한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잃어버린 노트'라는 이름은 적절하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 내용을 얼마나 이해하느냐는 측면에서 보면 딱 맞는 말이다.”

 

앤드루스 박사는 라마누잔 사후 50년이 넘는 기간에 수학자들이 이루지 못한 업적을 라마누잔이 이루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라마누잔이 발견한 것의 상당수는 라마누잔이 '가짜 세타 함수'라고 불렀던 항등식 족 과 관련된 것이었다. 앤드루스 박사는 '가짜 세타 함수'를 함축된 의미는 매우 심오하지만, 산술적으로는 간단한 주장 이라고 말했다.

 

'라마누잔의 정원'에 뿌려진 씨앗

 

 

지난달 라마누잔 학회에서 물리학자 프리먼 다이슨 Freeman Dyson이 밝혔듯, 라마누잔의 수학 연구는 이론 물리학계에 새롭게 등장하여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 잡은 초끈이론(superstring theory, 우주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들이 둥근 형태가 아니라 연속적으로 진동하는 끈 형태라는 이론 옮긴이) 연구에도 도움이 됐다. 다이슨은 "순수수학 측면에서 봤을 때, 초끈이론은 라마누잔의 정원에 뿌려진 씨앗에서 자라난 다른 꽃들처럼 아름답게 핀 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컴퓨터로 원주율을 수백만자리까지 계산할 때도 라마누잔의 또 다른 항등식이 사용되었다. 그 항등식은 이전의 어떤 방법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정확한 원주율 값에 근접한다. 하지만 늘 그랬듯, 라마누잔은 그저 자신의 발견을 강력하게 주장했을 뿐 증명한 적은 없다. 나중에야 보인 박사와 그의 형제인 피터 B. 보와인이 그 수백만자리 숫자가 실제로 원주율이라는 것을 엄밀하게 증명했다.

 

수학자들은 마술처럼 보이는 라마누잔의 공식을 적용해보면서 그가 이론의 심층부, 그러니까 아직 드러나지 않은 전체 윤곽을 파헤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라마누잔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 깊이 생각해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디 교수는 라마누잔의 출신을 따졌고 유럽 사회에서 격리되어 부적절한 교육제도에 심각하게 방치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학자들이 이제야 알게 되었듯이 라마누잔은 괜찮은 고등학교에 다녔고 약간의 책도 읽었으며, 고향에는 학자로서의 삶을 동경하게 해준 문화적 전통도 있었다.

 

라마누잔의 짧지만 풍성했던 삶에서 교훈을 찾는 사람들은 100년 지난 지금, 지구가 많은 부분에서 그만큼 부족해졌다는 사실을 종종 깨닫는다.

 

애스키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라마누잔이 중요한 이유는 단지 수학자라서가 아니라 인간의 정신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능력을 갖춘 사람은 극히 드물다. 하지만 그만큼 귀하기 때문에 절대 놓치면 안 된다. 천재는 세상 어디에서든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원주율에 관한 수수께끼 같은 공식

 

수학자들은 라마누잔의 많은 공식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앞서 말한 공식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원주율 계산에서 깜짝 놀랄 정도로 빠른 방법을 제공한다. 바로 지난해, 한 컴퓨터 과학자는 라마누잔의 공식 하나를 이용해서 원주율을 1700만 자리까지 계산했다. 그 계산이 성공한 직후에야 수학자들은 왜 라마누잔의 통찰이 옳았는지 증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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