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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사

입실론-델타 논법을 만든 수학자 코시(Augustin Louis Cauchy, 1789~1857)

by 팥맛콩 2022.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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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탱 루이 코시는 파리의 중산층 가정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일생은 가우스처럼 조용하지 못했다. 대혁명이 일어난 바로 그해에 태어난 코시는 일찍부터 재능을 드러냈고,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몽주의 뒤를 이어 아카데미에 들어갔으며 에콜폴리테크니크의 교수가 되었다.

 

입헌 체제를 인정하지 않고 구체제로 돌아가려는 왕실에 맞서 일어난 혁명 당시 국왕이던 샤를 10세가 물러나고 루이필리프 1세가 즉위했다. 보수적인 입헌 왕정을 자유주의적인 입헌 왕정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부르주아 지배 체제를 정비했다.

 

1830, 7월 혁명이 일어나자 열렬한 왕당파인 그는 프랑스에서 도망쳐 스위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을 방랑했다. 그리고 1838년에 다시 파리로 돌아와 제수이트파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하지만 1848년에 "2월 혁명이 일어나 교수에 대한 제한이 느슨해졌으므로 소르본 Sorbonne의 교수가 될 수 있었다. 1852년에 제2 제국이 탄생했지만, 나폴레옹 3세는 코시가 교수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을 허락했다. 그리고 코시는 1857년에 그 생애를 마감했다.

 

코시 일가는 혁명에 의해 상당히 힘든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신앙심이 깊은 집안이었으므로 코시는 어렸을 때부터 엄격한 카톨릭식 교육을 받았으며, 그것이 평생 그의 생활을 좌우했다.

 

수학에 대한 그의 높은 자질은 당시의 라그랑주를 깜짝 놀라게 했다. 라그랑주는 코시의 아버지에게 빨리 문화적 교양을 쌓게 하도록 충고했다.

 

"그러지 않으면, 아드님은 대 수학자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자기 나라의 글조차 제대로 쓸 줄 모르게 될 겁니다."

 

라그랑주의 충고에 코시는 호메로스, 호라티우스, 베르길리우스 등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1805년에 에콜폴리테크니크에 들어간 그는 그곳을 졸업하자 토목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토목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1810년에 영국과 마주한 노르망디의 항구 도시 셰르부르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나폴레옹이 영국 정벌을 위해 커다란 군항을 만들고 있었다. 코시는 출발할 때 네 권의 책을 가져갔다고 한다. 라그랑주의 함수론, 라플라스의 천체역학, 베르길리우스의 책과 토마스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였다.

셰르부르에 있던 3년 동안 코시는 '수학을 전부 처음부터 복습하고 간단히 하며 새로운 정리를 발견할 것'을 목표로 삼았다고 한다. 그의 위대한 업적의 기초는 이때 다져졌을 것이다. 1813, 그는 일을 그만두고 파리로 돌아와 수학 연구에 전념했다. 그리고 차례차례 수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에콜폴리테크니크 및 소르본 대학의 교수가 되자 그는 교육에 열중했다. 그 점에서는 가우스와 정반대다. 그의 강의에는 학생뿐만 아니라 앙페르, 스튀름과 같은 유명한 학자와 외국에서 온 디리클레 Johann Peter Gustav Lejeune Dirichlet 같은 손님도 자주 모습을 보였다.

 

코시는 해석학 교정미적분법 강의 요강등 수학에 관한 훌륭한 저서를 여러 권 펴냈다. 자신의 저서에서 그는 그때까지의 수학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무한소의 개념을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었다. 해석학 교정의 서문에서 코시는 자신의 신념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수학적 해석을 완전히 하기 위해 노력한다고는 하지만, 나는 한편으로 이 해석이 모든 과학을 만족시킨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의심할 여지 없이, 자연 과학에서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실제로 관찰하고 그 관찰 결과를 통계로 통일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확을 기하기 위한 방법이 수학적 증명 또는 감각의 증인 이외에는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중대한 오산이다. 지금까지 아우구스투스의 존재 또는 루이 14세의 존재를 수학적으로 증명하려고 시도한 적은 없지만, 누구나 그들의 존재를 피타고라스의 정리나 매클로린의 정리와 똑같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며 의심하지 않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매클로린의 정리 등은 매우 특수한 소수의 사람만이 이해하고 있지만, 학자들도 그 정리의 성립 범위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에 비해 17세기 프랑스를 누가 통치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는 다른 여러 분야, 예를 들면 종교와 도덕, 정치에 관한 문제에도 통용된다. 우리는 수학 이외에도 진리가 있고 감각 이상으로도 실재가 있음을 확신해야 한다. 우리는 수학을 연구하더라도 정당한 범위 밖으로 나와서는 안 된다. 공식을 가지고 역사를 공격하거나 적분을 사용해 도덕을 규정할 수 있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코시가 이렇게 화를 내며 공격하는 대상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무한소의 개념을 올바르게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그저 말로 얼버무린 채 다음으로 진행하려 한 달랑베르, 발산 급수 등을 발명해 사람들을 현혹한 오일러 등의 18세기 수학자뿐만이 아니다. 볼테르와 루소, 달랑베르, 디드로 등을 통해 커다란 흐름이 되어 부르봉 왕조를 전복시킨 혁명 사상, 대수학의 광명으로 도덕을 밝히라고 말한 콩도르세, 크리스트교를 추방하고 이성을 숭배하도록 명령한 로베스피에르 등 이들에 대한 분노가 모두 담겨 있는 것이다.

 

코시는 열렬한 가톨릭 신자이며 또한 왕당파였기 때문에 공화주의자들에게는 상당히 미움을 샀다. 그 무렵은 부르봉 왕조의 마지막 왕인 루이 18세와 함께 프랑스로 돌아온 귀족과 성직자들이 옛날의 권력을 되찾아 반대파를 탄압하던 시대였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1830년의 7월 혁명 때까지 이어졌다. 정치적으로는 이 반동의 시대를 즐겁게 추억하기는 힘든 일이지만 그때까지의 수학을 강도 높게 비판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18세기의 수학은, 말하자면 순풍을 너무 받아 필요 이상 앞으로 나아간 배와 다름없었다. 암초나 장애물도 무시했다. 그로 인해 배에는 여기저기 구멍이 생겼고, 당장이라도 침몰할 기세였다.

 

코시는 무한소의 개념 외에 무한급수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생각하고,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오류가 숨어 있을 수 있는지 밝혀냈다.

 

아카데미에서 코시의 보고를 들은 라플라스는 깜짝 놀랐다. 그는 즉시 집으로 돌아가 천체역학속의 급수를 살펴보기 시작했고, 검토가 끝날 때까지 누구의 방문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코시의 가장 큰 업적은 함수론의 창립이다. 수학 안에서도 돋보이게 아름다운 그의 정리는 이후의 발전에 기본적인 바탕이 되었지만, 현재 우리들로서는 이해를 할 수 없다. 그림이라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이든 다른 유명한 화가의 작품이든 한눈에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식과 기호로 무장된 보물 창고에는 조금도 다가갈 수가 없다.

 

코시의 발견은 1825년에 이뤄졌지만, 그보다 훨씬 전인 1811년에 가우스는 천문학자인 베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이 이 중요하고도 아름다운 정리를 알고 있음을 밝혔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가우스는 그 외에도 수많은 발견을 조금도 공표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고작 친구나 제자들이 가우스가 두껍게 친 극비의 커튼에서 새어 나오는 비밀을 조금씩 알아냈을 뿐이었다.

 

코시는 이 점에서도 가우스와 정반대였다. 그는 생각하는 동시에 논문을 썼고, 논문을 씀과 동시에 그것을 아카데미에 보냈다. 코시가 평생 쓴 논문은 789편이며, 그중에는 8권이나 단행본이 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아카데미는 코시가 보내오는 논문의 홍수를 막기 위해 ‘1편당 4쪽 이내라는 제한을 두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코시는 바로바로 발표했기 때문에 그가 죽은 뒤 발견된 유고 遺稿는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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