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아벨과 야코비의 경쟁
카를 구스타프 야코프 야코비는 1804년 12월 10일, 베를린 교외의 포츠담에서 부유한 유대인 은행가의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고전어와 수학에 비상한 재능을 드러냈다. 당시 독일의 중학교에서는 수학을 암기 과목으로 취급했다. 야코비는 그런 방식이 불만이었기 때문에 교사와 오랫동안 사이가 좋지 못했다.
그러나 교사도 나중에는 야코비가 원하는 대로 혼자서 오일러의 책 등을 읽도록 놔두었다. 그리고 야코비는 아벨과 마찬가지로 5차 방정식에 손을 댔다.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프랑스의 갈루아 또한 중학교 시절에 5차 방정식에 몰두했다.
5차 방정식에 대해서만 따지자면, 야코비가 가장 불운한 인물이었다. 5차 방정식은 대수적으로는 풀 수 없음을 제일 처음으로 증명한 수학자는 아벨이며, 대수적으로 풀 수 있는 방정식의 형태를 일반적으로 결정한 수학자는 갈루아다. 야코비는 허망하게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아벨과 달리 야코비는 모든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올렸다.
“보기 드문 재능을 신에게 선물 받은 그는 수학과 어학에 대한 지식이 탁월했으며, 특히 그리스어와 역사에는 비범했다."
그는 1821년 베를린 대학에 들어갔는데, 대학에서도 어학 실력의 향상 속도는 그의 주임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수학에 매력을 느낀 야코비는 어학보다 수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이런 부분은 가우스를 연상시킨다.
1825년 베를린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야코비는 강사가 되었고, 이듬해인 1826년에 쾨니히스베르크 Köigsberg로 이주했다.
야코비는 훗날 타원함수의 연구로 아벨과 경쟁을 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연구가 잘 풀리지 않았다. 어느 날 그가 기운이 없는 것을 보고한 친구가 이유를 묻자 야코비는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 이 르장드르의 《적분학 연습》을 도서관에 반납하러 가는 길이야. 그런데 정말 기분이 엉망이야. 난 중요한 책을 읽으면 그때마다 새로운 아이디어(생각)가 떠올라서 뭔가 연구를 할 수 있었어. 그런데 이번만큼은 얻은 게 하나도 없어. 무엇 하나 떠오르는 게 없는 거야."
야코비는 하나의 연구에서 실마리를 얻어 그것을 발전시키는 것이 특기였다.
아벨은 제2권과 제3권에서 타원함수 연구를 발표했다. 처음의 일곱 장은 1827년 9월 20일에 발간된 제2권에 실렸고, 남은 세 장은 1829년 2월 12일에 아벨이 크렐레에게 보내 같은 해 5월 20일에 발간된 제3권에 실렸다. 타원함수의 발견이 처음으로 공표된 것이다.
아벨은 다 쓴 논문을 크렐레에게 발송하기 전에 야코비의 정리를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이론에 특별한 경우로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별로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방향을 바꿔 '대수적으로 풀수 있는 특수한 방정식에 대한 메모'를 쓰기 시작했다.
봄이 되어 바다의 얼음이 녹자 야코비의 증명이 실린 <천문소식> 이 크리스티아니아에 도착했다. 야코비의 증명은 아벨이 이제 막 공표한 타원함수의 성질을 아벨의 이름도 언급하지 않고 사용한 것이었다.
아벨은 자신의 뒤를 쫓아오는 경쟁자가 있음을 알았다. 그는 <크렐레지> 에 보낼 타원함수론의 나머지 부분을 쓰고 있었지만 즉시 중지해야 했다. 적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것은 위험했다. 아벨로서는 갑자기 등장한 이 경쟁자를 무슨 일이 있어도 제압해야 했다. 그리고 그는 논문 '타원함수의 변형에 관한 일반적인 문제의 해결'을 써서 1828년 6월의 에 실었다. 아벨은 홀름보에에게 이 논문을 '야코비 정벌 논문'이라고 말했다. 한스틴은 편지와 함께 이 논문을 슈마허에게 보냈다.
"이 편지와 함께 타원함수에 관한 아벨의 논문을 보냅니다. 야코비가 턱밑까지 쫓아왔으므로 되도록 빨리 인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천문소식>의 최근호를 본 아벨 군은 완전히 파랗게 질려서, 정신을 차리기 위해 가게로 달려가 진한 브랜디를 한 잔 마셔야 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아벨 군이 알려주는 일반적인 방법은 그가 수년 전에 발견한 것이며, 야코비의 정리보다 넓은 범위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슈마허는 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 논문을 알렸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당신이 예전 연구를 공표했다면 아벨은 브랜디 한 잔으로는 부족했을 겁니다."
이에 대해 <근세 수학 사담>의 저자 다카키 데이지는 아벨의 편에 서서 “하지만 그건 조금 가혹한 처사다."라고 말한다.
"한번 아벨의 처지가 되어 보자. 그는 가우스와 같이 우선권 따위는 태연하게 초월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하다. 아벨은 자신도 놀랄 정도로 수많은 발견'을 했지만, 넓은 세상에 그것을 인정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 전 세계를 놓고 생각해도 그런데, 하물며 본국에는 그의 능력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었겠는가? 옛 스승인 한스틴도 친구인 홀름보에도 그 능력을 믿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벨은 케케묵은 5차방정식으로 가우스의 인정을 받고 돌아온 것도 아니고, 그의 전문인 고등함수 또한 파리의 아카데미에서 묵살되지 않았는가? 그들은 괴팅겐이나 파리의 평가 없이 독자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런 아벨에게 타원함수론은 마지막 카드였다. 그런데 갑자기 등장한 야코비에게 훼방을 당한다면 설곳이 없지 않겠는가? 빛과 폐병과 맞서 싸우면서, 말 그대로 심혈을 기울여 써야 했던 《타원적분 변형론》이다."
아벨은 그 논문을 5월 27일에 보냈다. 그런데 바로 그 무렵(5월 18일), 크렐레는 아벨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자네의 연구를 점점 사람들이 이해하기 시작했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니콜라스 후스 씨는 자네의 연구가 커다란 기쁨이라는 편지를 보냈어. 또 괴팅겐의 가우스에게 그가 30년 동안 연구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도는 타원함수에 대해 뭔가 보내 달라고 부탁하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네.
현재 다른 일로 바빠서 연구를 정리할 시간이 없습니다. 아벨 씨는 저를 앞질렀습니다. 적어도 연구의 3분의 1은 그렇습니다. 제가 1798년에 걸어갔던 길을 그도 걷고 있지요. 그가 저와 거의 같은 결과에 이른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의 글 솜씨는 깊은 통찰력과 우아함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같은 문제에 대해 제가 언급하지 않아도 되리라 생각합니다.'
나로서는 가우스의 이 비평이 정말로 기쁘네."
니콜라스 후스는 오일러의 조수였던 사람으로, 그 무렵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오일러의 유고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는 오일러를 대신해 그 누구보다도 빨리 아벨을 인정했다. 5차방정식에서는 아벨을 슬프게 만들었던 가우스도 마침내 그의 천재성을 인정했다. 가우스는 함수론의 창립자인 코시도, 또 아벨의 경쟁자인 야코비도 칭찬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발언의 무게를 아는 제왕이었다. 그러니 가우스의 칭찬에 크렐레가 기뻐한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당사자인 아벨은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가우스는 아벨에게 3분의 1을 추월당했지만 아직도 3분의 2를 가지고 있다고 선언했다. 아벨은 이 엄청난 격차에 거의 절망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가우스의 칭찬은 수학계에서는 최상의 보증이었다. 5월 30일에 (가우스가) 슈마허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가우스는 “아벨은 내 연구의 3분의 1 정도를 추월했네. 게다가 일부에서는 사용하는 기호까지도 나와 똑같았네."라고 말했다.
이렇게 아벨의 지평선은 천천히 밝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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