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아벨의 죽음과 경쟁자를 잃은 야코비 그리고 그의 유산
베를린에서는 크렐레가 아벨을 베를린 대학으로 불러오려는 운동을 펼쳤다. 그리고 거의 임용이 결정되었을 때 누군가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져 아벨의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그것은 가우스도 야코비도 아니었다. 크렐레는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희망은 무너졌고, 힘든 생활이 계속되었다. 아벨은 그 무렵 한스틴 부인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전 교회의 생쥐처럼 불쌍한 존재입니다. 지금 제 수중에는 1달러 60실링밖에 없지만, 그것마저도 팁으로 줘야 합니다. 하지만 1실링도 낭비한 것은 아닙니다. 상인에게 103달러 26실링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슈마허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제 논문이 인쇄되어 쾨니히스베르크로 보내졌다고 합니다………….”
이 짧은 편지의 끝에는 이름 대신에 '불쌍한 자로부터' 라고 쓰여 있었다.
아벨의 논문을 읽은 야코비는 그해 9월, 르장드르에게 편지를 썼다.
"귀하는 분명히 아벨 씨의 논문 두 편을 받으셨을 겁니다. 하나는 <크레레레지>에, 다른 하나는 <천문소식>에 실린 것입니다. 보셨겠지만, 아벨 씨는 변형의 일반론을 그의 방식으로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그 발표는 제가 6개월 빨랐습니다. 두 번째 논문에는 변형론의 엄밀한 증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 논문에는 그것이 빠져 있음을 저도 잘 압니다. 그 증명은 제가 감히 평가할 수도 없을 만큼 훌륭하며, 제 연구를 훨씬 뛰어넘는 걸작입니다.”
르장드르는 아벨에게 편지를 보내서 아벨의 연구를 칭찬했다. 그리고 야코비의 비평도 알렸다. 하지만 아벨이 파리 과학 아카데미에 제출한 논문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물론 야코비도 그냥 지고만 있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의 더욱 치열한 경쟁이 시작되었다. 클라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1828년은 타원 함수론의 건설을 둘러싸고 아벨과 야코비가 치열한 경쟁을 펼친 시대였다. 다루는 문제는 같았지만, 이 경쟁에서 양쪽의 근본적인 성적은 분명히 달랐다. 아벨은 최대의 독창성을 발휘해 가장 일반적인 문제를 정복해나갔다. 그에게 수학상의 아이디어는 살아 움직이는 요소였다. 게다가 그 아이디어는 순수하고 추상적이었기 때문에 기하학적인 직관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다. 한편 야코비는 천부적인 예견 능력을 바탕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갈 때마다 신선한 계산 기술을 구사해 정복한 영역의 구성을 확고히 했다. 야코비가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바탕으로 그 명석한 두뇌가 명령하는 길을 따라 여러 가지 장애물을 뛰어 넘으며 목표를 향해 전진할 때 아벨의 정신은 하늘 높이 올라가 모든 것을 내려다보며 비행했고, 나아가 일반적인 목표를 향해 전진했던 것이다."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비행기와 탱크정도가 되지 않을까?
1828년 가을, 아벨은 병으로 한 달 반 정도 누워 있었다. 그리고 12월 중순에 프롤랜드에 갔다. 그곳에서 약혼자인 크리스티네 켐프와 스미스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서였다. 크리스티네는 철공소를 경영하는 스미스 집안에서 입주 가정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아벨은 프롤랜드에 도착한 뒤에도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침대에 누웠다.
아벨은 파리 과학 아카데미에 보낸 논문이 어떻게 되었는지 마음에 걸렸다. 그는 잠자코 기다렸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르장드르도그 논문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이 없었다. <크렐레지>에서 아벨은 그 논문이 있다는 사실을 누설했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게다가 자신의 병이 나을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1829년 1월 6일, 스미스 씨의 집에서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그는 자신의 발견을 남기기 위해 별실에 틀어박혀 두 쪽짜리 논문을 써 크렐레에게 보냈다. 그것이 아벨의 마지막 글이었다.
20세기에 들어 미타그레플러Magnus Gösta Mittag-Leffler(1849~1927)라는 수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1829년 1월 6일은 문화사적으로 제국이나 국가의 기념일보다 훨씬 기념할 만한 날이다. 그날, 아벨은 병상에 있으면서 그의 생애의 마지막 사상을 를 위해 썼다. 그것이 아벨의 덧셈정리였다. 그것은 발표 즉시 '청동보다 오래 갈 기념탑Monumentum aere perennius, Horatius, Carmina III' 이라고 불렸는데, 실제로 아벨 탄생 100주년이 된 오늘날에도 수학 진보의 정점이라고 볼 수 있다.”
아벨이 자신의 발견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정리를 글로 완성한 날부터 3개월 뒤인 1829년 4월 6일, 그는 세상을 떠났다.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 하룻밤을 보낸 뒤 크리스티네의 팔에 안겨 숨을 거둔 것이다. 아벨은 파리의 아카데미에 보낸 논문의 행방을 알지 못한 채 죽었다.
야코비는 에서 그 논문의 존재를 알고 르장드르를 추궁했다.
“이런 대발견이 2년도 전에 귀하의 아카데미에 보내졌는데, 귀하의 주의를 끌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르장드르는 다급히 논문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행히 코시의 서류 속에 묻혀 있던 논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행히'라고 말한 이유는, 코시에게 보낸 갈루아의 논문은 아예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르장드르는 그 논문을 읽고 경악하며 '청동보다 오래 갈 기념탑'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1830년에 파리에서 일어난 7월 혁명으로 코시가 망명했고, 1833년에 르장드르가 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그 논문이 노르웨이 정부의 손에 들어가 출판된 때는 1841년이었다. 아카데미에 제출된 지 15년이 지난 뒤였다.
한편 아벨이 본국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음을 안 르장드르와 푸아송 등은 예전에 나폴레옹의 부하였던 스웨덴 왕 베르나도테에게 편지를 보내, 아벨을 스톡홀름의 아카데미에 초청하도록 요청했다.
독일에서는 크렐레의 노력이 훔볼트를 움직여 아벨을 베를린으로 불러오기로 결정되었고, 크렐레는 4월 8일에 아벨에게 편지를 썼다.
아벨이 죽은 지 이틀 뒤였다. 신이 난 크렐레가 그 사실을 아벨에게 알리며 빨리 베를린으로 오라고 재촉하고, 건강에 주의하라는 당부를 잊지 않은 그 편지를 이곳에 싣는 것은 독자들의 가슴을 너무나 아프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홀름보에에게 아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크렐레는 신문에 그 사실을 발표했다. 그 글을 읽은 슈마허는 아벨의 부고를 가우스에게 알렸다. 그때 영국의 영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소식도 알렸다. 영은 아벨이 세상을 뜬 지 한 달 뒤에 사망했다. 가우스는 그에 대해 답장을 보냈다.
"편지를 받고 아벨이 죽었음을 알았습니다. 이는 학문의 커다란 손실입니다. 이 비상한 영재의 경력에 대해 무엇인가 쓰여 있는 것을 구하신다면 부디 제게도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초상화가 있다면 그것도 부탁합니다. 훔볼트와 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훔볼트는 그를 베를린으로 불러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6월에는 파리에도 그 소식이 알려졌다.
6월 4일, 르장드르는 야코비에게 편지를 썼다.
"이 편지를 다 쓸 무렵에 아벨 씨가 크리스티아니아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제 가슴은 깊은 슬픔으로 찢어지듯 아팠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가슴에 병을 앓고 있었는데, 겨울의 심한 추위에 그 병이 심해졌던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수학의 진보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뼈아픈 손실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머물었던 짧은 기간 동안 그가 남긴 기념탑은 그의 추억을 후대에 영원히 전할 것이며, 그 천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었는지 사람들이 깨닫도록 할 것입니다."
경쟁자를 잃은 야코비는 무슨 말을 했을까?
"먼젓번 편지를 보내고 2, 3일 뒤에 아벨 씨가 죽었다는 슬픈 연락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 정부는 그를 베를린으로 초청했습니다만, 그 편지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베를린에서 그를 만날 수 있으리라 여겼던 제 희망은 무참히도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그가 제출한 근호로 풀 수 있는 방정식을 정하는 문제, 대수함수의 적분에 관한 일반적인 성질의 놀라운 발견 등은 그야말로 비교될 것이 없는 뛰어난 업적입니다. 그는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커다란 선례를 남겼습니다."
아벨을 지키던 별이 스칸디나비아의 하늘에서 떨어졌을 무렵, 프랑의 하늘에는 새로운 별이 나타나 상상을 초월한 광채를 발산하다 유성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갔다. 바로 에바리스트 갈루아였다. 너무나도 빨리 사라져 버린 이 유성의 광채를 인정한 수학자는 아무도 없있다.
아벨은 갈루아의 존재를 알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지만, 만약 그가조금 더 오래 살아서 갈루아와 만났다면 그것은 하위헌스와 라이프니츠의 만남보다 훨씬 극적이었을 것이다. 야코비는 아벨의 경쟁자였지만 창조력이라는 측면에서는 도저히 아벨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아벨과 갈루아의 비슷한 점을 살펴보자. 이 둘은 모두,
1. 젊은 나이에 죽었다. 아벨은 26세, 갈루아는 20세.
2. 16세에 수학의 매력에 이끌렸다.
3. 5차방정식을 풀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패했다.
4. 18세에 아버지를 잃었다.
5. 방법은 달랐지만 5차 이상의 방정식을 풀 수 없음을 증명했다.
6. 파리의 아카데미에 논문을 제출했지만 인정받지 못했다. 그리고,
7. 그들의 논문이 발표된 것은 제출한 지 15년이 지나서였다.
둘의 다른 점이 있다면 아마 성격일 것이다. 아벨은 내성적이었으나 갈루아는 건방졌다. 아벨은 죽기 전에 그 업적을 인정받았지만 갈루아는 죽은 뒤 14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인정을 받았다. 아벨은 정치 운동을 몰랐지만 당시 프랑스의 정세는 갈루아를 그 소용돌이에 끌어들였다.
분야 면에서는 두드러지게 일치하는 점이 있다.
아벨의 주요 분야는 방적식론과 타원함수론, 적분론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갈루아의 분야이기도 했다. 야코비가 감탄했듯이 아벨은근호로 풀 수 있는 방정식을 구하는 문제를 제시했다. 그러나 아벨은 그것을 해결하지 않고 죽었고, 그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갈루아였다.
또 르장드르가 '청동보다 오래 갈 기념탑' 이라고 부른 아벨의 적분론을 갈루아는 놀랄 정도로 발전시켰다.
물론 이는 우연의 일치 따위가 결코 아닐 것이다. 갈루아는 열심히 아벨의 논문을 읽었고 그 문제를 계승했으며 해결했다. 말하자면 갈루아에게 옮겨 붙은 아벨의 혼이 갈루아의 천재성을 빌려 자신이 남긴 문제를 풀었던 것이다.
'수학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운의 수학자 아벨과 그의 경쟁자 야코비1 (Niels Henrik Abel, 1802-1829, Carl Gustav Jakob Jacobi, 1804-1851) (0) | 2022.09.01 |
---|---|
수학의 3대천재 아르키메데스2(Archimedes, BC 287?-BC 212) (0) | 2022.09.01 |
입실론-델타 논법을 만든 수학자 코시(Augustin Louis Cauchy, 1789~1857) (0) | 2022.08.27 |
FLT를 증명한 위대한 수학자 앤드루 와일즈2 (Andrew John Wiles, 1953-현재) (0) | 2022.08.23 |
FLT를 증명한 위대한 수학자 앤드루 와일즈1 (Andrew John Wiles, 1953-현재) (0) | 2022.08.21 |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