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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사

미적분의 위대한 창시자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Von Leibniz, 1646~1716)

by 팥맛콩 2022.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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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트프리트 빌헬름 폰 라이프니츠는 뉴턴보다 4년 정도 늦은 164671일에 독일의 라이프치히시(Leipzig)에서 태어났다. 폴란드 출신 집안으로,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라이프니츠는 윤리 교사인 동시에 공증인이었다.

 

그는 6세에 아버지를 잃었지만 혼자 힘으로 공부해 12세에는 라틴어를 막힘없이 읽을 수 있게 되었고, 그 뒤에는 그리스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집에는 아버지가 남긴 책들이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읽으면서 홀로 공부했다.

 

그리고 1661년에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해 1663년에 졸업했다. 졸업 논문은 논리학에 관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1학기는 예나 대학 (Friedrich Schiller University of Jena)에서 수학을 연구했다.

 

라이프니츠는 1672년부터 1676년까지 파리에서 지냈다. 처음에는 마인츠(Mainz) 후국의 외교관 자격으로 루이 14세의 궁정에 갔다. 그 무렵 프랑스는 루이 14세의 치세로 번영이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파리는 태양처럼 유럽 위에 찬란하게 빛났다. 사람들은 극장에서 몰리에르의 희극을 보고 마음껏 웃으며 즐겼다. 데카르트와 페르마, 파스칼은 이미 세상에 없었지만, 재정 총감인 콜베르가 1666년에 창립한 과학 아카데미에는 토성의 고리를 발견하고 진자시계를 발명해 세계적으로 명성을 크게 얻은 하위헌스가 초청받고 네덜란드에서 와 있었다.

 

라이프니츠는 논리학을 좋아했고 수학을 즐겼으며 기계를 발명하는 것이 취미였다. 모든 것을 가장 단순한 형태로 분해해 그 메커니즘(구조)을 이해하고 그것을 가능한 한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재구성하는 작업, 그것은 평생에 걸쳐 라이프니츠를 지배했다.

 

라이프니츠는 파스칼의 계산기를 자기 방식대로 개량하기도 했는데, 그 모형이 콜베르의 주의를 끌었다. 콜베르는 라이프니츠의 계산기를 아카데미에 보여 주었고, 그 일을 계기로 라이프니츠는 하위헌스와 친분을 쌓게 되었다. 당시 하위헌스의 나이는 43, 라이프니츠는 26세였다.

하지만 그 무렵 라이프니츠의 수학에 대한 지식은 그다지 깊지 못했던 것 같다. 그는 하위헌스에게 진자시계 Horologium Oscillatorium라는 저서를 받았지만, 그 책에 나오는 중심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하위헌스는 간단하게 그 개념을 설명하고, 파스칼의 책을 읽어 보도록 권했다.

 

라이프니츠는 그때부터 열심히 수학을 공부했을 것이다. 이듬해인 1673년에는 벌써 미분법에 대한 책의 초고를 완성했다. 라이프니츠는 편지에서 본인이 직접 말했듯이, 영원불멸한 신과 달리 수명이 한정된 인간으로서는 이해가 가장 빠른 사람이었다. 따라서 뛰어난 선생인 하위헌스의 간단한 설명에서 무수한 아이디어(관념)를 이해해, 순식간에 수학사에 길이 남을 기록을 만들어 낸 것이다. 하위헌스를 진심으로 존경했던 라이프니츠는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끊임없이 자신의 수학적 진보를 알렸고, 그의 가차 없이 날카로운 비평을 기다렸다.

 

1675년의 원고에는 처음으로 미분 적분의 기호가 등장했다. 현재 전 세계에서 사용하고 있는 그 기호다. 이 기호의 등장으로 수학은 급속히 발전하게 되었다. 라이프니츠는 해석의 비밀 중 일부는 그 기호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모든 것을 단순하게 분해하려고 했던 그는 사람의 생각조차도 몇 가지 기호로 조립하려고 했다.

 

1976, 하노버 Hannover 후국의 도서관 사서가 된 라이프니츠는 파리를 떠나 하노버로 이주했다. 그리고 1684년에야 비로소 미적분법에 관한 논문에 세상에 나왔다. 이 새로운 방법은 금세 대륙으로 퍼져나갔다. 프린키피아가 나오기 3년 전이었다.

 

라이프니츠는 철학에서도 독창적인 사상을 만들어 종교상의 다툼으로 고립되었으며, 1716년에 완전한 고독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뉴턴과 마찬가지로 평생 독신이었다.

 

그러나 뉴턴과 라이프니츠 모두 미분과 적분의 개념을 확실히 설명하지는 못했다. 미적분을 계산하려면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 0이지만 0이 아닌 이른바 무한소를 사용해야만 했다. 이것을 사용하면 여러 가지 계산이 아주 간단해졌던 것은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미적분이 널리 퍼져나갔던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새로운 마법이었다. 그 마력은 거의 무한대여서, 곡선의 접선을 긋는 일에서 별의 궤도를 정하는 일까지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시작에 불과했다. 다음 세기는 그 마법이 과학의 여러 분야를 정복해 나가는 시대였다.

 

그 시대의 주요 마법사로는 베르누이 일가와 달랑베르 (Jean Le Rond d'Alembert, 1717~1783), 오일러 (Leonhard Euler, 1707~1783), 라그랑주, 라플라스 등이 있었다.

 

라이프니츠와 뉴턴 사이에 미적분의 발견에 대하여 많은 역사적 다툼이 존재하였다. 유럽대륙의 학자와 영국의 학자들 간의 교류를 단절시킬 만큼 당시의 수많은 학자가 논쟁을 벌여온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다.

뉴턴과 라이프니츠는 각자 고유한 방법으로 미적분을 연구하였음을 오늘날의 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는 바이며 현재 오늘날 사용하는 미적분의 기호는 대부분 라이프니츠가 고안한 기호에 따라 미적분학의 수학적 토대를 완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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